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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e/푸쉬킨 1799-1837

푸쉬킨 "보리스 고두노프", 푸슈킨

by wj_s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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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고두노프  Борис Годунов  Boris Godunov

알렉산드르 푸쉬킨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1837 시인

 

보리스 고두노프 푸쉬킨이 1825, 미하일롭스코예로 추방당한 시기에 비극으로 2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은 모든 것들이 변해도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다. 처음으로 핸드폰이 나왔을 때만 해도 벽돌만 한 사이즈에 무게 또한 팔뚝이 아플 정도였고 가격 또한 어마어마했었는데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이젠 초등학생들도 다 가지고 다닐 정도의 생활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핸드폰의 진화가 단순한 전화 통화의 기능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스마트 폰이라는 많은 부분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으로 변화했다. 이제는 책을 읽는 것보다는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일이 더 빈번해졌다. 그래서 현대 사회가 만든 중독 증상 중 하나가 바로 ‘스마트폰 중독’ 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소설이 인기를 얻으면 스크린화 되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잊혀져 있던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흥행을 하면 원작이기 때문에 불티나게 팔리며 다시금 큰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컴퓨터도, 텔레비전이나 극장이 없었을 때는 무엇이 지금의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중 하나인 드라마와 영화 등을 대처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음악회, 발레, 연극, 오페라 같은 공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간을 놓이면 다시는 그 장면을 볼 수 없는 딱 한 번의 그 ‘공연’을 보기 위해 모두 극장(Theatre)으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예전에는 오페라가 성공을 하거나 관심을 받으면 그 오페라가 사용한 *리브레토(Libretto)의 원작이 재조명받거나 더욱더 인기몰이를 한다. 

*리브레토 - 오페라, 오페레타, 칸타타, 뮤지컬, 발레 등의 작품에서 사용되는 텍스트, 즉 대본이다.

 

러시아의 ‘국민 시인’인 최고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Александр С. Пушкин, 1799-1837)의 작품 하나도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지만 ‘이 오페라’ 하나 때문에 빛을 발하고 다시 재조명되었다.

바로 그의 희곡인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푸쉬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 Борис Годунов, Boris Godunov> 는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쓴 역사드라마다.

그는 카람진이 쓴 <러시아 제국의 역사>를 읽으며 러시아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라 할 수 있는 ‘혼란의 시대’(1604-1613)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에 2년 간 머물면서 카람진의 역사서 <러시아 제국의 역사> 10권, 11권을 기초로 역사 드라마를 구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푸쉬킨은 맹신적으로 카람진의 해석을 따랐고 그 결과 비평가들에게서 푸쉬킨이 역사성과 사실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작가적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1831년 초판의 제목이고 1825년에 쓰인 초고의 제목은 <모스크바 국가의 실제적 불행과 황제 보리스와 그리쉬카 오트레피예프에 대한 희극> 이었다. 완결 초고는 25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초판본은 6장과 14장이 빠져 23장으로 되어있고 초판본은 초고에 비해 빠지거나 덧붙여진 부분들이 조금씩 있다. 초고가 출판되지 못한 이유는 황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황제의 허락 후 출판을 할 당시에도 푸쉬킨은  이 작품이 무대에서 공연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희곡이지만 전통적인 희곡과 달리 연극에서 내용의 큰 단락을 구분하는 단위인 막(act)이 없이 23장(scene)으로만 구성되어있다. 

 

러시아 역사 속에서 기구한 운명의 왕중 하나였던 보리스 고두노프 (Борис Годунов, Boris Godunov)는 사실 굉장히 냉철하고 능력 있는 통치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1600년대 초 러시아를 덮친 끔찍한 가뭄과 기아, 모스크바의 방화 사건, 굶주린 농민과 도시 빈민의 반란이 그를 무능한 왕으로 몰아붙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그는 왕위 하고는 완전 먼 자리인 황제 이반 뇌제(또는 이반 4세)의 둘째 아들 표드르의 부인의 오빠였다. 이반 뇌제에게는 3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어서 결코 그는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위 ‘진골’인 루릭 왕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반 뇌제 자신이 큰 아들을 죽였기에 둘째 아들 표드르가 왕에 올랐고 그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거기다 막내아들 드미트리가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의문사를 하자 보리스 고두노프가 왕위에 오르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벌어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의 단종 이야기와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 러시아 역사에서의 다른 점은 나중에 이반 뇌제의 셋째 아들인 드미트리를 사칭한 사람이 나타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과 손을 잡고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까지 살해하며 다른 귀족들과 치열한 정권 탈취 경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 시대가 바로 ‘혼란의 시대’ 인 것이다. 

 

 

이런 멋있는 작품은 푸쉬킨 사후 30년이 되어서야 극으로 무대로 올라갔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알았던 일인지 이 작품은 읽을 때는 참 멋있지만 무대에서는 빛을 바라지 못했다. 그렇게 잊혀지던 찰나, 러시아의 색채가 아주 뛰어나고 러시아의 바그너라고 불리는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에 의해 다시 재조명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런데 <보리스 고두노프>는 항상 퇴짜를 한 번은 받아야 속이 후련해지는지 무소르그스키가 1869년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 오페라 상연을 의뢰했는데 거절당했다. 이유인즉 초판에는 뚜렷한 여주인공이 없고 러브스토리도 전혀 없는대다 군중 장면만 많은 지루한 작품이어서 관객이 잠을 잘거라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희곡으로서도 그리 각광을 받지 못한 이유일까? 그래서 무소르그스키는 눈물을 머금고 가짜 드미트리와 폴란드 귀족의 딸인 마리나와의 사랑이야기를 3막에 끼워 넣었다. 그리하여 1874년 1월 24일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으나 너무 어둡고 복잡한 내용에 의해서 인지 무소르그스키의 원작은 그 후 잘 사용되지 않았고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유명을 달리한 후 절친인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유품 중 이 작품을 발견하고 수정을 하여 새로운 판을 만들었고 1908년 다시 한번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의해 개정되었는데 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개정판이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기획한 러시안 시즌(Les Saisons Russes) 을 통해 파리의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고 오페라는 큰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파리 무대에서는 표도르 샬랴핀(F. I. Chaliapin, 1873-1938) 이라는 최고의 베이스가 ‘보리스 고두노프’를 불렀는데 아직까지도 샬랴핀의 고두노프가 가장 소름이 돋는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푸쉬킨과 무소르그스키 두 사람은 모두 역사적 “사실” 보다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인간”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랬기에 원고를 쓸 당시 셰익스피어의 맥배스의 영향을 받은 푸쉬킨은 역사적으로는 고두노프가 드미트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희곡에서의 고두노프는 어린 드미트리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갈등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 이 죄책감이었다. 무소르그스키도  자신의 특기인 러시아 언어의 리듬을 살린 독창적인 작곡법으로 고두노프의 “극적 인간미”를 한껏 표현했다. 거기다 무소르그스키가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묵직하고 어두운 톤은 더욱더 보리스 고두노프의 ‘죄책감’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게 1초를 다투며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 욕구 등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듯싶다.

누구나 자색 황제 옷을 입기 바라고 상위 1% 로에 속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 자색 옷이, 상위 1% 로가 어느 것이냐에 따라 인간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빠른 변화를 추구하는 시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잠시 눈을 감을 수 있는 시간,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조용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 바로 이런 여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잠이 들기 전 보리스 고두노프처럼 모든 걸 가졌지만 한 순간 이것이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 항상 공포에 짓눌리는 생활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다 해도 이 삶이 더 행복한 삶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어는 제가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의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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