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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프로코피예프 1891-1953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도박사" 줄거리 & 등장인물

by wj_s 2021.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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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사 Игрок The Gambler 4막 6장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1891-1953) 소련 작곡가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1916년에 작곡된 러시아어 버전이고 두 번째는 1927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된 리브레토를 사용한 버전이 있다. 

미국과 소련에서 초연 무대를 갖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고 결국 브뤼셀에서 프랑스어로 초연을 하게 된다. 

 

✔️원작 : 도스토옙스키 소설 <노름꾼>

✔️대본 : 프로코피예프 (뎀친스키 조언이 있었음)

✔️작곡 : 1915-1916, 1927

✔️초연 : 1929년 4월 29일 브뤼셀, 프랑스어

 

등장인물

알렉세이

장군 아이들 가정교사

테너

폴리나

장군 양녀

소프라노

퇴역 장군

군복을 입고 있음

베이스

노부인 Бабуленька

장군의 친척

메조 소프라노

마르키스

폴리나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

테너

미스터 아슬레이

부자 영국인

바리톤

마드모아젤 블랑쉬

장군이 좋아하는 여인

콘트랄토

닐스키 백작

 

팔세토 테너

부르메르겔름 바론

 

베이스

파타쁴치

 

바리톤

 

작곡 배경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노름꾼>은 주인공 알렉세이를 통해 사랑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명과의 상하관계, 수평관계,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페라 리브레토로 사용하기 좋았을 듯싶다. 

사실 많은 작곡가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좋아했고 음악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시도를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사> 일 것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사>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노름꾼>을 모티브로 사용했다. 두 작품의 제목이 다른 것 같지만 러시아어 표기는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도 <도박사>라고 번역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한국어 표기 통일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된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Сергей Прокофьев, 1891-1953)는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러시아 음악사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혁명 전의 작곡가들을 러시아 작곡가라고 하고 혁명 후의 작곡가들을 소련 작곡가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혁명 후 활발한 창작활동을 한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작곡가라고 말한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만큼 쉽게 세상에 나온 작품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노름꾼>은 27일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완성된 작품인데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도박사>는 구상부터 초연까지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14년 23세의 프로코피예프는 런던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Сергей Дягилев, 1872-1929)를 만났다. 

디아길레프는 ‘발레 뤼스(Ballet Russe)’라는 러시아 발레단을 조직하여 러시아 음악, 오페라, 발레 등 러시아 예술을 파리를 비롯해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에 소개하는 전설적인 기획자였다. 특히 1914년쯤은 혜성같이 나타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Игорь Стравинский, 1882-1971)가 그의 대표작인 발레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을 발표하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프로코피예프는 디아길레프와의 만남에서 많은 기대를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프로코피예프는 디아길레프를 만나자마자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을 주제로 오페라를 계획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제안이 디아길레프에게 흥미롭길 바랬지만 당시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적인 주제나 선사 시대의 주제를 가진 발레를 그에게 의뢰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예술계를 보면 유럽에게 있어 러시아는 신세계였다. 그들에게 러시아는 춥고 먼 나라였기 때문에 아는 것이 거의 없어 디아길레프가 그런 유럽을 위해 선택한 ‘러시아적인 주제’ 나 ‘선사시대의 주제’는 아주 신선한 것이었다. 

특히 파리는 유럽의 모든 예술가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에 웬만한 작품으로는 콧대 높은 파리 청중이나 예술가들, 평론가들의 마음을 사로 잡지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디아길레프의 의뢰를 받고 쓴 작품은 오페라 <도박사>가 아닌 발레 <알라와 롤리(Ала и Лоллий)>다. 

이 작품은 스키타이의 신화를 시인인 세르게이 고로데츠키(Сергей Городецкий, 1884—1967)가 대본을 쓴 것인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너무 닮았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디아길레프에게 거절당한 프로코피예프는 <알라와 롤리>에서 4곡을 발췌해서 <스키타이 모음곡(Скифская сюита)>으로 재탄생시킨다.

 

보통의 사람은 인생에서 큰 변화를 맞이 할 수 있는 이런 만남에서 퇴짜를 당하면 슬퍼하거나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디아길레프의 거절은 프로코피예프로 하여금 그와의 협력을 단념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전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는 계기가 되어 결국 디아길레프와는 몇 년 후 여러 작품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디아길레프가 거절한 1916년부터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 등 작곡가로서 여러 장르의 작품을 작곡해 보았는데 거기에 오페라 <도박사>도 포함되어 있다. 

 

오페라 <도박사>는 1916년에서 1917년에 걸쳐 1차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대대적인 수정을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곧바로 초연을 할 수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 1963년에서야 모스크바에서 초연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초연은 오페라 버전이 아니라 콘서트 버전으로 극장이 아닌 콘서트 홀에서 있었다. 오페라로서의 초연은 1974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첼리스트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내인 소프라노 비쉬넵스카야, 오그니브쩨프, 마슬레니코프 등의 무대로 이루어졌다. 

오페라 <도박사>는 우리에게 다가오기까지 참으로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그렇지만 또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 버렸다.

생각보다 이 오페라를 무대에서 보기가 힘들다. 이 오페라의 고향인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이나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조차도 이 오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Валерий Гергиев, 1953-)의 출현으로 인해 요즘은 가끔이라도 무대에서 <도박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르기예프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러시아 오페라, 발레를 자신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마린스키 극장의 무대에도 자주 올리지만 세계 곳곳의 무대에도 러시아 예술을 알리기 위해 자주 연주한다. 

어쩌면 21세기의 디아길레프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게르기예프의 노력 때문인지 다른 유명한 지휘자들도 차츰 러시아 음악을, 어려워서 연주할 수 없었던 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 노력을 함께 하고 있다. 

 

만약 프로코피예프가 디아길레프의 거절 후 오페라라는 장르에 혐오를 느끼고 <도박사>를 미워했다면 지금같이 좋은 작품을 세상에 선물할 수 있었을까?

인생은 어느면으로 도박적인 부분이 있는 듯싶다. 원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룰렛의 숫자, 내가 원하는 숫자가 나오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나중에 다른 우연을 통해 함께 작품을 만들고 유명해지는 것도 도박에서 내가 돈을 건 그 숫자가 나오는 행운을 잡는 것과 같은 것일 듯싶다.

하지만 도박과 인생은 절대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첫 번째 버전

어렸을 때(18세)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노름꾼>을 읽었고 ‘오페라 소재로 쓰기 참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프로코피예프는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했다. 1913년 11월 다시 이 소설을 읽을 때, 룰렛, 군중, 도박(азарт)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를 생각하며 흥분하였다고 한다. 

1914년 여름 런던에서 디아길레프와 아침 식사를 하며 <도박사>가 오페라를 위한 좋은 소재라고 말했지만 디아길레프는 그 어떤 관심도 갖지 않았고 오페라보다 발레에 신경을 썼다. 프로코피예프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게 도와준 것은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 지휘자였던 알베르트 코우트스Альберт Коутс였다.

 

1915년 9월 말에서 10월 초, 프로코피예프는 3막에 대한 짧은 요약을 작성했고 1916년 4월 피아노 버전의 총보를 완성했다. 그리고 오페라가 마린스키 극장 1916/17 시즌의 레퍼토리에 포함은 1916년 4월에 결정되었다. 이후 프로코피예프의 친구이자 작가인 보리스 뎀친스키Борис Демчинский는 룰렛 장면을 굉장히 좋게 만들었고 3막을 나누라는 조언을 하였다. 그래서 4막으로 대본이 완성되었다. 이것에 대해 *이고리 비쉬넵스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페라의 전반적 플랜이 훨씬 드라마틱해졌다. 그래서 프로코피예프는 오페라 대본을 좋게 만들어 준 친구에게 평생 감사했다.”

 

이고리 비쉬넵스키에 따르면 오케스트라 총보는 1916년  6월에 완성되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일기에는 ‘3막은 9월에 벌써 완성되었다’라고 쓰여있다. 오케스트레이션이 극도로 지연되어서 1917년 1월 22일에서야 끝났다. 초연 일정한 여러 번 연기되었다. 4월에 배역 분담이 되었고 10월이 되어서야 연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미망인이 오페라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제기하였다. 1917년 1월 6일, 프로코피예프는 직접 그녀를 만났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1917년 4월, 도스토옙스키의 저작권의 법적 후계자가 아들로 바뀌었고 그는 프로코피예프에게 원작 사용 허가를 서면으로 알렸다. 도스토옙스키의 미망인과는 대화로 문제를 풀었다면 아들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감독과 무대감독이 보골류보프, 람빈에서 메이에르홀드와 골로빈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2월 혁명 후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메이에르홀드가 만드는 초연은 러시아 무대에서 막혀버렸고 1917년 5월 결국 레퍼토리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10월 혁명 후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를 떠날 것을 결심했고 1918년 봄, 미국 콘서트 투어를 떠나면서 오페라 악보는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겨 놓았다. 

*Вишневецкий, Игорь Георгиевич 러시아 시인, 영화감독, 문학사와 음악사 학자

 

 

두 번째 버전

해외에서는 오페라 <도박사>를 무대에 올리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 *클레오폰테 캄파니니Cleofonte Campanini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18년 9월 당시 시카고 오페라 지휘자였던 그는 이 오페라를 들어볼 수 있었고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계약 단계에 이르자 기술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총보가 없었고, 대본은 영어로 번역을 해야 했고, 총보의 피아노 버전의 문제 점 등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보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수정해야 되는 부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오페라 <도박사> 이렇게 시카고 오페라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 오페라는 좋아한 캄파니니를 위해 프로코피예프는 오페라 <3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을 작곡해주기로 약속했다. 게다가 메이에르홀드는 <도박사>를 연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22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도박사> 상연을 제안했고 1926년이 되어서야 오페라 상연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1927년 소련СССР 첫 연주 여행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오페라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도박사> 피아노 버전의 총보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페라 작곡 후 10년이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작곡가는 새 버전으로 다시 작곡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작곡 기술은 성숙해졌고 어떻게 하면 오페라가 더 좋아질지가 보였고 복잡한 부분은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로코피예프가 1925년 1월 25일에 *먀스콥스키Мясковский,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도박사>의 새 버전은 주요 부분은 그대로 남았지만 아예 새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2번째 버전의 첫 공연은 레닌그라드의 구 황실 극장(현재의 미하일롭스키 극장)에서 메이에르홀드와 라들로프의 연출, 드라니쉬니코프 지휘, 미술감독은 쉐스타코프의 손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연이 초연이 될 수 없었다. 

오페라 <도박사>의 세계 초연은 1929년 4월 29일 브뤼셀의 La Monnaie 극장에서 두 번째 버전의 프랑스어 버전인 <Le Joueur>으로 이루어졌다. 브뤼셀의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1929년 3월 19일 메이에르홀드에게 작곡가는 편지를 썼다.

‘조국에서 초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참 섭섭합니다. 1928/29 시즌에 계획되었던 레닌그라드 공연도 없었습니다.’

*먀스콥스키Мясковский,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1881-1950 러시아 작곡가, 소련 작곡가, 예술학 박사, 음악평론가, 20세기 초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중 한 명으로 1908년부터 1949년 사이에 27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줄거리

벨기에, 상상의 도시 룰레텐부르그, 1860년대 중반

 

퇴역한 장군은 아이들과 양녀 폴리나, 아이들의 가정교사인 알렉세이와 함께 온천에 온다. 그곳에서 사기꾼인 마드모아젤 블랑쉬의 영향으로 룰렛을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온 전 재산을 잃고 후자Маркиз에게까지 빚을 지게 된다. 

폴리나는 알렉세이에게 자신이 가지고 온 보석을 저당 잡아 카지노에 가서 돈을 따자고 제안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퇴역 장군은 돈이 없는 상황에서 벋어 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상속인으로 되어 있는 부자 할머니가 빨리 죽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부자 할머니는 죽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룰레텐부르그에 온다. 장군은 할머니에게 돈을 요청하지만 할머니는 거절한다. 대신 호기심이 생긴 할머니는 카지노로 향하고 가지고 온 돈 전부를 잃는다.

퇴역 장군은 폴리나가 후작과 결혼하는 것을 바란다. 알렉세이는 폴리나를 사랑하고 어떻게든 그녀를 돕겠다고 약속한다. 알렉세이는 도박을 하러 가고 큰돈을 딴다. 그래서 흥분한 나머지 폴리나 조차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다. 이 모습을 본 폴리나는 알렉세이도 자신의 양부와 마찬가지로 알렉세이도 룰렛에 미친것이지 고귀한 목표는 단지 변명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알렉세이는 그녀에게 돈을 주지만 폴리나는 받은 돈을 알렉세이 얼굴에 뿌려버린다. 폴리나의 경멸은 알렉세이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그래도 도박에 대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도박 테이블에 있었다. 

 

 

       <초연>

  • 1929년 4월 29일 <도박사> 세계 초연 두 번째 버전의 프랑스어 버전으로 <Le Joueur>이란 제목으로 La Monnaie 극장, 브뤼셀
  • 2001 6월 5일 <도박사> 첫 번째 버전의 초연, 모스바 볼쇼이 극장

        그외 공연

  • 작곡가 살아생전 첫 번째 버전의 오페라는 러시아어로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러시아 청중(당시 소련 청중)은 1963년 12월 7일 콘서트 버전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

  • 1966년 오페라를 영화로 만들었고 소련 시대에는 에스토니아 극장에서 1970년 9월 26일 에스토니아어 버전이 있었다. 

  • 1974년 4월 7일 볼쇼이 극장에서 첫 러시아어 버전이 무대에 올랐는데 오페라의 두 번째 버전이었다. 이 공연은 1982년까지 50회 공연을 할 수 있었다.

  • 마린스키 극장은 게르기예프의 지휘와 치헤이드제의 연출로 1991년 12월 5일 두 번째 버전의 오페라를 상연했다. 

 

2021/02/18 - [Music/프로코피예프 1891-1953] -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도박사" 줄거리 & 등장인물

 

*러시아어는 제가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의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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