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전쟁과 평화 Война и Мир War and Peace / 13 장면 scene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Sergei Prokofiev (1891-1953) 러시아 작곡가
✔️원작 : 톨스토이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 (1830)
✔️대본 : 프로코피예프 & 미라 멘델손
✔️작곡 : 1943년
✔️초연 : 1944년 10월 16일, 모스크바 - 콘서트 버전
1946년 6월 12일 말릐 오페라 극장, 레닌그라드 (부분적으로)
1957년 11월 8일 스타니슬라프 와 네미로비치-단첸코 극장, 모스크바 (모스크바 초연, 13 장면 모두 있는 풀 버전)
1959년 12월 15일 볼쇼이 극장, 모스크바
톨스토이의 장황하고도 심각하고 방대한 양의 대서사시 <전쟁과 평화>는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С. Прокофьев,1891-1953)의 손을 통해 오페라로 재탄생하게 된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는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창작된 작품이다.
1막, 2막 같은 막의 개념이 아닌, 13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오페라의 리브레토는 두번째 부인인 마리아 멘델손-프로코피예바(М. Мендельсон-Прокофьева, 1915-1968)와 함께 썼다. 이 오페라를 만들기 위한 첫 아이디어는 1941년 4월에 떠올랐고 그 해 8월부터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애국심에 불타오르던 프로코피예프는 작곡하고 있던 다른 작품들을 모두 중단하고 <전쟁과 평화>에 혼신을 다하게 된 것이다.
1942년 4월 13일엔 11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오페라 <전쟁과 평화>의 피아노 버전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페라에 두 장면(«Бал у Екатерининского вельможи» и «Военный совет в Филях»)을 더 넣었고 다른 장면들도 조금씩 수정하여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가진 오페라로 만들어 1943년에 13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오페라 <전쟁과 평화>가 완성 되었다.
오페라 <전쟁과 평화>의 초연은 1944년 10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콘서트 버전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라인데 무대 디자인이나 의상이 없이 오직 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해 콘서트 버전으로 공연 된 이유는 당시 스탈린 정부는 무대공연에서 의상이나 배경을 모두 금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 정부는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를 통해 제정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황제, 귀족이 나오는 모든 것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시기가 시기인 만큼 프로코피예프는 작업 중에 전쟁 장면마다 애국심을 ‘부풀리라는’ 소비에트 위원회의 ‘권고’를 받았다.
그러다 겨우 오페라의 모습으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1946년 6월 12일, 레닌그라드 말릐 오페라 극장(Ленинградский Малый оперный театр)에서 1막-앞 8개의 장면-에 새로 쓰여진 장면을 더해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공연을 위해 새로 두 장면(«Бал у екатерининского вельможи» и десятая — «Сцена военного совета русского генералитета в Филях»)을 써 넣어 오페라 상연 길이상 2막짜리 오페라를 만든 것이다. 그 후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던 프로코피예프는 비평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죽을 때까지 이 오페라를 더욱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풀 스케일 공연은 스탈린 사망 후인 1957년에 와서야 가능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전쟁과 평화>를 완성한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의 원작에 비하면 당연히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서사적 웅대함은 찾아볼 수 없다.
방대한 작품을 한정적인 무대에 올릴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문제 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프로코피예프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중 가장 극을 잘 끌어가는 주인공들을 뽑아 제일 필요한 장면을 재연하여 당시 상류층 사회의 모습과 애국적 모습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바그너처럼 엄청 긴 오페라를 시리즈적으로 고안하여 하루에 4-5시간짜리 공연을 연달아 며칠동안 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면 하룻밤에 단 몇 시간으로 550명이 넘게 등장 하는 두꺼워서 들고 다니기 조차 힘든 <전쟁과 평화>를 한번에 다 보여줄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몇시간 동안이라도 톨스토이의 걸작을 무대에서 재연하여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1818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톨스토이가 창조해낸 문학적 향기를 맡으며 역사적 사실을 음악으로 재창조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코피예프의 <전쟁과 평화>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다른점은 프로코피예프는 나타샤와 안드레이의 사랑이 가장 중점이 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나타샤와 안드레이의 사랑은 처음부터 부각 되었던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들의 무수히 많은 일들 중에 한 부분이었고 어느 순간 수면위로 떠오르듯 그들의 사랑이 부각은 되지만 안드레이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나타샤는 이 이야기의 다른 주인공인 삐에르와 결혼하여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금 깊게 생각하게 된다.
처음부터 프로코피예프의 마음을 사로 잡은 장면이 <전쟁과 평화>중 나타샤와 안드레이의 사랑이었으니 그것에 초점을 맞춰 극을 꾸려 간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오페라의 전반부인 <평화>는 젊고 열정적 여주인공 나타샤 로스토바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후반부는 보로디노 전투가 무대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는 톨스토이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전쟁’ 부분과 상통하는 내용을 보여주며 러시아인 만이 가질 수 있는 긍지와 애국심이 메인 스토리가 된다.
프로코피예프가 살던 1941년의 독일의 침략은 <전쟁과 평화>의 배경인 1818년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무모한 러시아 공격과 평행선상에 있었고, 어쩌면 이런 평행선상이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의 철학으로 삼은 ‘역사의 성공과 실패는 하든 개개인의 재능이나 의사(意思)사에 달린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반영되는 가에 달렸다는 것’ 의 연장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프로코피예프의 위대한 오페라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늘 이 세상 어디에선간 전쟁이 진행 중이다. 많은 국가들이 함께 하는 전쟁도 있고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도 있다. 그래서 뉴스를 보는 시간이 즐겁지만은 않다.
뉴스는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여러가지 소식을 시청자들에게 알려 준다. 그런데 좋은 소식을 보면 기분이 좋지만 안 좋은 뉴스가 나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나쁜 소식보다는 좋은 소식이 많기를 바라는 것이다.
러시아 뉴스에는 언제나 전쟁 소식이 많았다. 내전도 많고 테러도 많다보니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전쟁까지 포함하다 보니 안 좋은 뉴스가 정말 넘쳐났었다.
언젠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평화가 올까?
어디에도 분쟁이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함께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있을까?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2016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조차 모르게 또 우리 곁을 떠나간다.
내년엔, 2017년엔 지금보다 더 행복한 뉴스가 우리 곁에 있기를 조용히 기도해 본다.
미르(1)가 정말 미르(2)이기를…
* 마지막 밑줄친 문장에 대한 설명 :
러시아어 мир(미르) 가 가지고 있는 뜻은 2가지이다. 첫번째 뜻은 세계, 세상 이고 두번째 뜻은 평화이다.
그래서 이 문장에서 첫번째 미르(1)는 첫번째 뜻인 세계, 세상 이고 두번째 미르(2)는 두번째 뜻인 평화이다.
*러시아어는 제가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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