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Моцарт и Сальери / 2막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Николай Андреевич РимскийьКорсаков
✔️원작: 푸쉬킨의 작은 비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1830)
✔️대본: 푸쉬킨 작품을 조금의 줄여서 그대로 사용
✔️작곡: 1897년
✔️초연: 1898년 11월 6(18)일 사립 러시아 오페라 극장, 모스크바
한 사람은 뻥을 조금 보태자면 태어나면서부터 ‘천재’ 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역사에는 많은 라이벌이 존재한다. 어느 나라이든 어느 시대이든 라이벌은 꼭 존재했었다.
라이벌들은 너무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 이야기들은 전설이나 ‘카더라’ 라는 말을 만들기 쉽기도 했다.
후세는 그들을 존경하기도 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자신들의 영웅들을 ‘신’의 경지에 올려놓기를 좋아했고 뭔가 그들 사이의 문제가 풀리지 않거나 의문이 많을 경우 그것을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길 바랬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푸쉬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이다.
1791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무수히 많은 ‘소문’들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살리에리의 독살설’이다.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 1787)’의 초연을 본 살리에리가 질투에 휩싸여 야유와 못마땅함을 표현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푸쉬킨은 “모차르트의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돈 조반니’를 보고 욕을 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랬다. 푸쉬킨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며 숭배하던 모차르트의 죽음을 쉽게 넘길 수 없었고 그의 섬세한 상상력은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류머티즘으로 인한 열로 심장이 약해져 있었으며 같은 병으로 1791년 12월, 심장 충격으로 인한 과다 출현을 일으켜 사망했다는 정설을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구설을 더 믿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의 작은 믿음을 글로 썼을 것이라 생각된다.
살리에리는 평범은 했지만 그래도 잘 나가는 작곡가였다. 하지만 천재의 출현으로 인해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의 무능함을 시시각각 느꼈어야 했다.
‘천재만 없어진다면? 그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평범한 음악가는 다시 최고가 될 수 있을까?’
아마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작품 하나하나마다, 그의 피아노 연주마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갑자기 자신의 삶에 생긴 큰 암 같은 존재를 어떻게 제거해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찰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든 약육강식의 세상이니까.
어쩌면 있는 사실보다 ‘상상’을 자극하는 가십이 인간의 뇌리에 깊이 박히기 때문에 ‘가설’들이 난무할 수도 있다.
살리에리가 세상을 뜬 후 푸쉬킨의 희곡이 나와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살리에리가 이 글을 읽고 노발대발 난리를 치며 푸쉬킨을 고소했을 수도 있다.
뭐, 그랬다면 아마 역사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사건이 되고 다른 예술가에게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
러시아 음악의 토대를 만든 <러시아 악파 5인조> 중 가장 유명했던 림스키-코르사코프(Н. РимскийьКорсаков, N. Rimsky-Korsakov(1844-1908))는 푸쉬킨의 <작은 비극> 4편의 희곡 작품 중 하나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토대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72년 작곡가 자신이 리브레토를 만들기 시작하여 1개의 scene이 작곡되었고 그 해 여름 2개 scene을 더해서 8월에 작곡이 끝났다. 그리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작품을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시스키(Александр С. Даргомыжский, A. S. Dargomyzhskii, 1813-1869)에게 헌정하였다.
1897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작은 챔버 오케스트라를 이용해 이 작품을 아주 가까운 자신의 지인들과만 공유했다. 말이 쉽지 작은 챔버 오케스트라 정도를 꾸려서 집에서 자신의 작품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다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인데 역시 당시 최고의 교수로 엄청 비싼 과외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것에 대한 밑바침이 아닐까 싶다.
작곡가 자택에서 선보인 초연 1년 후인 1898년 마몬토프 후원으로 존재한 모스크바 솔로도브니코프 극장에서 그랜드 초연이 있었다.
요제프 트루피의 지휘 아래 모차르트는 테너 바실리 쉬카페르(Василий П. Шкафер, V. P. Shkafer, 1867-1937) 살리에리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베이스 표도르 샬라핀(F. I. Chaliapin, 1873-1938)이 불렀다.
특이한 것은 이 오페라의 등장인물 수이다.
보통 오페라라고 생각하면 수많은 인물의 등장과 합창단, 가끔은 미니(?) 오케스트라까지 무대에 올라가 아무리 큰 오페라 극장이라도 무대가 작다고 느껴질 만큼 군단적인 스케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등장인물은 단 3명이다.
다르고믜스키에게 헌정을 한 것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큰 뜻을 가지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챔버 오페라’ 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만든 다르고믜스키의 공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르고믜스키(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Даргомыжский, 1813-1869)는 푸쉬킨의 ‘작은 비극’이라 일컫는 희곡 4편(<역병 시대의 향연«Пир во время чумы»>, <모차르트와 살리에리«Моцарт и Сальери»>, <인색한 기사«Скупой рыцарь»>, <초대받은 석상«Каменный гость»>)을 소리로 표현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리브레토(Libretto)를 썼다고 한다.
리브레토란 오페라나 오페레타, 칸타타 등 극적 형식을 취한 성악 작품 중 가사나 대사를 쓴 것으로 연극의 대본, 각본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쉽게 말하자면 오페라의 대본인 셈이다. 종합예술형태를 가지고 있는 오페라에서 리브레토는 극적 이야기와 문학적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시대별로 그 시대의 유행이나 선호도를 알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모방한 신화적인 것을 주제로 많이 삼았고 18세기에 이르자 그때마다의 시사적 화제를 주제로 삼으며 현실적인 색깔이 진해졌다. 동시에 대본의 극적 구성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 Shakespeare, 1564-1616)나 프리드리히 실러(F. von Schiller, 1759-1805)같이 대문호의 작품을 대본으로 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그 후에는 작곡가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는 일도 종종 생겨났다. 그만큼 시간이 갈수록 대본의 중요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세기가 들어서면서부터는 희곡을 그대로 작곡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현재도 희곡이나 소설을 토대로 리브레토를 만드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중요한 리브레토를 완벽에 가깝다고 극찬을 한 것을 보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다르고믜스키에게 가지고 있었던 존경은 단순한 인간을 존경하는 것을 넘어 ‘신’의 경지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무엇에든지 자신만만하고 자신이 최고임을 언제나 솔직하게 말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또 다른 멋있는 모습일 수도 있다.
사실 러시아 음악사에 있어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 러시아 음악이 발전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한 다르고믜스키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자신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튼 다르고믜스키의 <초대받은 석상>을 시작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1900년 세르게이 퀴(Sergei Cui, 1835-1918)가 <역병 시대의 향연>을, 라흐마니노프가 1905년 <인색한 기사>를 작곡함으로써 푸쉬킨의 작은 비극 4편은 모두 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처음엔 푸대접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언제나 큰 오페라 무대에 올려졌다. 하지만 오페라를 보러 오는 관객들은 이 큰 무대의 공허함으로 인해 항상 실망했다. 그들은 화려하고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페라의 극적 무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무대만 비어있는 것으로 실망을 한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실망의 원인은 작곡가가 만든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이다. 이 소규모 오케스트라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자신의 집에서 지인들에게 보여줄 때 주었던 그렇게 큰 감동을 큰 무대에서 주지 못 했다. 하지만 집에서 가졌던 초연을 본 화가 미하일 브루벨(Mikhail A. Vrubel’, 1856-1910)의 아내였던 소프라노 가수 나제즈다 자벨라(Nadezda I. Zabela-Vrubel’, 1868-1910)와 당시 피아노 반주를 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ff, 1873-1943)는 이 오페라에 대해 극찬을 했다.
자벨라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중 여성 리릭 파트를 다 불렀었는데 그랬기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을, 그의 생각을 그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좋아했을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했던 초연과 극장의 초연의 살리에리 파트를 표트르 샬라핀이 불렀는데 어찌 애정 하지 않을 수가 있었으랴!!!
아마도 나제즈다 자벨라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서 들었던 소규모 초연도 머릿속에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많은 시간을 같이 일했기 때문에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디테일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렇듯 관중들의 실망을 안겨준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고집 한 이유가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모차르트가 없을까 봐 두려워!” 라는 말을 남겼다. 아무래도 큰 무대를 꽉 채우는 무대장치들과 사람들은 푸쉬킨이 이 작은 비극에 담고 싶었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두 음악가의 심리적 상태를 강하게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뭐든지 듣는 것보다 그 무대 위의 것들이나 움직임에 먼저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내 눈 앞에 많은 것이 있으면 음악 집중에 방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있어 이 오페라는 그 어떤 오페라보다 주인공의 내면이 더 중요했다. 천재와 천재에 의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 그래도 평범한 사람 보단 천재에 가까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것은 푸쉬킨이 자신의 작품에서 동시대를 대표하는 두 음악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대립시켜 그들의 예리한 극적 대화와 독백을 통해 두 사람의 내면에서의 갈등과 음악 예술혼에 대한 문제, 특히 신의 소리(Vox Dei)냐, 인간의 소리(Vox populi)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걸 작곡가 자신도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푸쉬킨이 이 작품에서 보여준 두 주인공의 성격 묘사와 심리묘사는 상당히 뛰어나다. 그래서 이 희곡은 푸쉬킨의 심리적 리얼리즘(psychological reaism)의 대표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펼치자마자 바로 끝이 보이는 2장 231행으로 구성된 아주 짧은 작품에서 예술의 근원과 본질을 두 사람을 통해 펼쳐낸다는 것은 푸쉬킨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면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동시대의 제일 유명한 작곡가지만 두 사람의 너무나도 다른 본질에 의해 푸쉬킨이 자신의 생각을 극과 극으로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살리에리의 ‘사람들은 지상에 정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천상에도 정의는 없다’ 라는 모든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독백으로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살리에리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장인 기질이야말로 예술의 근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장인이 되었고 손가락은 마음대로 움직이는 무미건조한 속도를 주었지만 귀에는 정확성을 부여했다고. 그리고 화음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고.
*러시아어는 제가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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